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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수의 산이야기 │열번째 백암산
백암산 [ 741m, 전라남도 장성 ]
 
  기사입력  2004/10/18 [10:25]
● 현란함과 학바위의 웅장함이 만나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인터체인지를 벗어난 버스는 굽이굽이 산자락을 돌아갑니다. 장성호에 물안개가 듬뿍 끼어 신비로움을 더해줍니다. 약수리를 지나 백양사로 접어드는 길목 양쪽의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고 있는 단풍이 어여쁩니다.
매표소를 지나자 단풍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가 붉은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불덩이 속으로 알지 못할 마력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짙게 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학바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주차장에서 백양사에 이르는 단풍과 고목이 어울린 운치 있는 길을 산보하듯 천천히 걷습니다. 그러다가 백양사 입구 연못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넋을 잃습니다.
절세미인의 풍모로 연못까지 고개를 내민 유난희 고운 단풍의 현란한 색상이며, 단풍 빛으로 붉게 변해버린 연못 그리고 연못가에 서 있는 누각(쌍계루)이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었습니다. 타오르는 단풍과 연못은 학바위의 웅장함을 만나 절경이 되었습니다. 이는 바위와 단풍의 어울림이자, 현란함과 웅장함의 조화입니다. 나는 이런 풍경을 즐기고, 아내는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두 아들은 사람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냥 즐거워 합니다.

● 대자연의 오묘함이 선(禪)

쌍계루에 올라 연못을 바라봅니다. 단풍 너머로 백양사 일주문과 지붕들이 고개를 내밉니다. 누각에 앉아서 즐기는 백양사의 만추가 나를 행복의 나라로 안내합니다. 쌍계루에서 대자연의 오묘함을 즐기는 것 자체가 선(禪)이요 예불입니다.
백양사 일주문에 들어서기 직전 ‘이 뭣고’라는 화두를 만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일제시대에 백양사를 중흥시킨 만암대선사가 던진 ‘이 뭣고’라는 화두가 나를 되돌아 보게 합니다.
‘고불총림 백양사 일주문’을 들어서자 청정한 기운이 가슴 속 깊이 전달됩니다. 대웅전과 극락보전 주변을 붉게 물들인 단풍은 청정한 도량에 멋까지 부여해 주었습니다. 대웅전 뒤로 보이는 학바위는 활짝 핀 연꽃입니다. 저 웅장한학바위는 백양사를 지키는 부처이고 큰스님입니다.

“민성아, 도현아, 아빠 산에 올라갔다 올 테니까 오늘은 엄마랑 먼저 차 타고 가거라”

아내와 아이들은 다른 일정 때문에 같이 산행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약수동 계곡을 따라 오릅니다. 천연기념물 153호인 비자나무 숲이 짙푸릅니다. 난대성 상록수에 속하는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 섬들과 해안 산지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약 5,000그루가 자라고 있는 백암산은 비자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부방한계선입니다.
비자나무 숲 속에 핀 단풍은 군계일학입니다. 길가로 도열해 있는 아기단풍은 화려하면서도 그렇게 청순할 수가 없습니다. 하려함과 청순함이 양립할 수 있음을 이곳의 불타는 단풍을 보면서 확인합니다.
계곡에 수북수북 쌓여 있는 낙엽이 아직까지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단풍잎과 어울려 있습니다. 운문암으로 길게 이어지는 계곡 기로가 헤어져 학바위 쪽으로 가파른 길을 오릅니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단풍의 아름다움이 급경사의 오르막도 잊게 해 줍니다.

헉헉거리고 올라오는 나그네를 수십 미터 벼랑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약사암이 맞이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초라한, 그래서 정감이 가고 고즈넉한 느낌이 드는 암자였는데, 오늘의 약사암에는 그런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옹색합니다.
수백 년 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아쉬움을 달래 줍니다. 약사암에서 본 건너편 도집봉 비탈의 절벽과 붉게 물든 단풍이 장관입니다. 법당 뒤 벼랑에서 나오는 석간수로 목을 축입니다. 석간수 한 모금 마시고 바위에 앉아 보니 저절로 도가 통하는 것 같습니다.
약사암에서 영천굴은 지척, 약벙을 들고 있는 약사불이 아침햇살에 비취어 미소 짓고 있습니다. 굴 입구에는 영천이라고 하는 샘까지 있어 약사불이 생명수를 나누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굴 근처를 빨갛게 물들인 단풍이 약사불에 계절 감각을 불어넣어 줍니다.
회색을 띤 험준한 바위에 어쩌면 저렇게 예쁜 단풍을 피웠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전망 좋은 바위에서 멈추어 섭니다. 도집봉에서 사자봉으로 이어지는 건너편 산비탈을 온통 붉게 물들인 단풍 빛이 화려합니다. 초록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풍 일색, 바로 만산홍엽입니다. 그것도 동쪽 정면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황홀경으로 몰아넣습니다.
가파른 계산을 올라 한숨을 돌릴 즈음이면 때깔 고운 단풍이 등장하여 흘린 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주고, 저 아래로 보이는 백양사는 보리심을 갖도록 합니다. 백학봉이 가까워질수록 단풍은 시들고, 겨울을 기다리는 나무들은 외로워 보입니다.
백학봉(651m)에 올라서자 정상인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고, 동쪽으로는 순창군 복흥면 들판이 쓸쓸합니다. 백암산 전체가 만산홍엽을 이루고 있고, 약수동계곡 최상류인 상왕봉 남쪽 아래에 운문암이 편안하게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운문암은 백양사의 대표적인 암자로 약수동 골짜기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 가을이면 시인이 되는 스님

백학봉을 지나자 부드러운 능선길입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낙엽이 바람에 부딪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아름답고 쓸쓸한 계절에 스님 한 분도 산행에 나섰습니다. 스님에게는 산행 자체가 만행이고 구도행일 것입니다.
양복까지 입고 와서 따스한 햇볕을 이불 삼아 누워있는 사람도 이미 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가끔 나타나는 전망대 바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이는 오색단풍을 감상합니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지치지 않는 단풍의 물결입니다.
정상인 상왕봉(741m)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대부분 서울이나 부산 같은 곳에서 무박산행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약수동계곡을 사이에 두고 말발굽처럼 한바퀴 돌아가는 백암산 능선이 한눈에 바라보입니다. 북쪽으로 내장산 줄기가 가깝습니다. 망해봉-연지봉-까치봉-신성봉으로 이어지는 내장산 서쪽 능선이 준업하고, 까치봉에서 내가 서 있는 백암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부드럽습니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입암산이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입암산 뒤로는 고창의 방장산이 파도를 치고 있습니다.
남쪽의 약수동 골짜기는 물론 서쪽으로 내려 보이는 남창계곡 쪽 산비탈도 온통 붉은 색 일색입니다. 이렇듯 백암산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불타는 백암산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가슴까지 불타게 합니다.
사자봉으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왁자지껄 하던 사람들 속에 있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사자봉(722m)을 지나면서부터는 가끔 남창계곡의 깊은 골짜기가 한눈에 내려 보이고, 장성호의 푸른 물결도 넘실댑니다. 백학봉에서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붉은 파도를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특히 단풍과 어울린 학바위의 모습이 장관입니다. 백양사에서 정면으로 볼 때는 웅장하였지만, 측면에서 본 학바위는 아기자기합니다. 골짜기로 내려서자 정말로 고요합니다. 가끔 만나는 사람이 반가울 정도입니다.

키가 큰 참나무 아래로 단풍이 줄줄이 빨갛게 꽃을 피웠습니다. 햇살에 비친 단풍 빛은 빨강 색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색상입니다. 이렇게 현란한 단풍 앞에서는 내 마음도 흥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아니었다면 황홀한 감정을 가누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단풍을 즐기는 새들의 노래는 이미 천사의 목소리입니다.
약수동계곡을 거쳐 백양사로 내려가는 계곡 길은 단풍철이면 항상 번잡할뿐더러 시멘트 포장길이라 삭막한데, 이쪽은 한적할뿐더러 단풍도 화려하여 조용히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살짝 고개를 내민 가인봉과 주위의 붉은 단풍도 가관입니다. 한참을 내려와 청류암을 만납니다. 암자 앞 계곡 주변의 단풍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릴 빨간 감도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겨주고 있습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빨간 단풍과 대비를 이룹니다. 암자에 들어서자 그지없이 고요하고 청정합니다. 소요대사에서 만암대선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승대덕이 주석 했던 암자답습니다. 암자 뒤에서도 역시 붉은 단풍이 감싸고 있고, 동북쪽으로 보이는 도집봉의 바위들이 아기자기합니다.

“청류암 단풍이 제일 멋있네”

외출하다 돌아오던 스님의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청류암에서 가인리로 내려오는 길에서도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살고 있는 스님은 시인이 도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나가던 나그네도 시인이 된 스님의 마음 곁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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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18 [10:25]  최종편집: ⓒ kungi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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